[커미션/휘닥+도나] 나의 오랜 벗에게: Time Lord Victorious (2024)

맹세컨대 도나 노블은 이 여자를 오늘 처음 만났다. 바람 쐴 겸 잠시 시내로 나온 것부터 카페의 야외 좌석에 앉은 것까지 전부 즉흥적인 선택이었으니, 우연이라 해도 좋았다.

다만 저 펑퍼짐한 파란색 바지와 코가 닳은 가죽 부츠가 주는 친근감 때문인지, 아니면 햇살을 빚어낸 듯한 금빛 머리카락이 찰랑대는 모양이 눈에 띈 탓인지-. 자신의 건너편에 앉은 그녀를 향해 이렇게 툭 물은 것이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어요?"

맙소사, 수작질도 이런 형편없는 수작질이 있을까. 말하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다행히도 여자는 그닥 불쾌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얼굴이 일순 환해지더니, 슬픔과 행복 사이의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웃는 것이었다.

그렇게 대화를 몇 번 주고받자니, 도나는 어느새 상대에 대해 꽤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을 묻든 꽤나 선선한 기색으로 답해주니 그럴 수밖에.

- 내 이름은 조안 스미스예요.지금은 여행 중이고요.

- 친구를 찾고 있다고 해도 좋겠네요.

어때요, 내 얘기 한번 들어 볼래요?자신을 오래 전부터 알아왔다는 양 눈꼬리를 접으며 웃는 여자. 그 모습에 낯선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초면인데, 오늘 처음 만나는 건데. 왜 누군가 생각날락 말락 하는 건지. 머릿속을 간질이는 기시감을 되짚어보려 암만 노력해도 이상하게 흐릿한 얼굴만이 떠올랐다. 비에 젖은 갈색 머리칼에 크고 슬픈 눈-... 그게 누구였더라. 생각나지 않는다.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어깨를 으쓱했다. 찝찝함을 떨쳐내기 위한 제 나름의 필사적인 시도였다.

"어디 한 번 말해봐요. 나에겐 남는 게 시간이니까."

조안이라는 이름의 여자는 잔잔히 웃었더랬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나의 오랜 벗에게

"닥터!"

닥터는 자신이 등짝을 세차게 내리치는 손길에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무슨 짓이야! 고글을 벗고 눈을 부라리며 돌아보니 그의 컴패니언이 지지 않겠다는 기색으로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누가 닥터를 다가오는 폭풍이라 처음 불렀는지는 몰라도 도나 노블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이 틀림없었다. 시바의 현신과 같은 위압감을 풍기며 노려보는 그녀 앞에서 어떤 타임로드가 맥을 출 수 있겠는가.

그는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반항하듯 대꾸했다. "...아팠다고!"

"이게 뭐야?"

코 앞에 들이밀어진 것은 커스터드 크래커 상자였다. 닥터는 그게 무엇인지 한 박자 늦게 깨닫고 눈을 껌뻑였다. 미간을 좁힌 채 상자를 낚아챈 그가 표면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예 핥으려는 기세였으나 도나가 질색하며 등짝을 친 탓에 그 시도는 무산되었다.

"더럽잖아! 내가 아무데나 혀 밀어넣고 다니지 말랬지."
"이건 어디서 찾은 거야?"
"타디스 복도를 따라 걷다 발견한 방. 커스터드 크림 크래커 상자만 100개쯤 있던데. 내가 좋아하는 걸 알고도 혼자 몰래 먹으려고 꿍쳐둬?!"
"나는 이런 거 안 좋아하거든!"

어설픈 항변이었다. 도나가 믿는 기색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는 궁시렁 눈을 굴리며 상자를 집요하게 살폈다. 그러나 표정이 퍽 누그러진 게 아까와 달리 이 상자의 출처에 관해 짐작가는 바가 있는 모양이라고, 도나는 생각했다.

"타디스는 줄임말이라고 말해줬던가? 시간과 공간의 상대적 차원(Time And Relative Dimensions in Space)."
"지금 말 돌리려 하는 거지? 이 교활한 화성인이!"
"아니거든! 설명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타디스는 단순한 3차원적 공간이 아니야. 오히려... 구형 구조물에 가깝지. 위블리-워블리 타이미-와이미한 시간의 공. 내부가 선형적 시간을 따르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뿐인데, 가끔 이런 일이 생겨."

그가 커스터드 크래커 상자를 들어올렸다. 휴온 에너지 입자가 정전기마냥 가볍게 튀었다.

"미래의 방을 현재와 혼동한 거지. 내가 지금까지 이런 걸 100개씩 쟁여둔 기억은 없으니 아마 네가 들어간 방은-"
"-타디스의 미래라고?"
"그래! 잘 아네. 역시 치즈윅 제일 가는 타자 실력의 소유자라니까."

닥터의 칭찬에 도나는 조금 우쭐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과자를 하나 집어들어 입 안으로 쏙 밀어넣었다. 혀를 감싸는 달콤함에 만족스레 끄덕인 후 한쪽 눈썹을 추켜올린 것은 덤이다.

"미래의 닥터는 그래도 제법 먹을 줄을 아는 모양이네?"
"도나!"

*

...여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타디스에 입성한 직후의 닥터는 타디스가 선물한 커스터드 크래커를 하나 맛보더니 불현듯 눈을 빛냈다. 드디어! 드디어 입맛에 맞아! 잔뜩 흥분한 투로 그렇게 소리지르더니 타디스 복도 안으로 달려간 것이다. 야즈가 불확실한 낯빛으로 눈을 굴리고 물었다.

"쫓아가야 할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닥터를 따라갔다. 라이언 싱클레어는 방 안을 가득 메운 과자 상자들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다 뭐야?!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으며 하나를 집어 올리자 그 위에 닥터가 적어놓은 큼직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도나 노블을 위한 선물. 취급 주의!!!]

"타이미 와이미," 닥터가 과자 상자의 산을 헤치고 들어가더니 퍼질러 앉았다. 그리고 지극히 행복한 표정으로 과자 하나의 포장지를 벗겨 우물대기 시작했다. "위블리 워블리."

*

평화 속에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도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허공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당신이 친구를 위해 준비해둔 선물을 보고 혼자 먹으려 한 거라 오해해서 등짝을 쳤다고요? 이야, 무슨 그런 사람이 다 있다니? 미안하지만 진짜 이상하네요! ...왜요? 왜 그런 표정으로 날 보는 거죠?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조안 스미스는 얼빠진 낯으로 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내 너털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은 그녀가 머그잔 위에 양 손을 포갰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요, 정말 특이한 친구였죠. 당신 말이 맞아요."
"과거형인 이유가 있나요?"
"나를 잊었어요."

예상치 못한 답이었다. 도나는 재차 눈을 껌뻑였다. 조안은 천천히 말을 이었는데, 목소리 너머로 간신히 억누른 고통이 어른거렸다.

"내겐 친구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다들 떠났죠. 자신의 삶을 찾았거나, 죽었거나, 아니면 나를 잊어서. ...그 친구의 경우엔... 날 떠나기 싫어했어요. 맙소사, 정말로 싫어했죠. 그런데 기억을 잃었어요. 사고를 당했는데... 아마 내 잘못이었던 것 같아요."

조안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울혈된 잇자국이 애처롭게 붉었다. 터무니없겠으나 도나는 조안이 아주 오랜 세월을 보아온 얼굴을 했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옛날에 다쳐 채 아물지 않은 날것의 상처가,

"내가 바로 건너편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더라고요."

꺼질듯한 목소리를 타고 새어나왔다.

장막처럼 드리운 금빛 머리카락 아래 그늘이 드리웠다. 어깨가 무겁게 처졌다. 그런데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도나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조안의 손을 쥐었다. 어쩌면 외로웠던 것이리라. 견딜 수 없어서 이렇게 아무에게나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을 테지. 아, 가엾다. 그런 마음이 단단한 결심으로 뭉쳐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도나 노블은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앉아있어요?"

닥터가 고개를 들었다. 도나는 최대한 힘주어 그녀를 다그쳤다.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거예요. 요즘 의사들 실력 좋잖아요. 안 그래요? 기억은 꾸준히 자극하면 살아난다니까, 아직 그 친구를 되찾고 싶다면-"

지끈. 익숙한 낯선 감각이 두통의 형태로 다시금 찾아왔다. 머리가 날카롭게 조여드는 듯한, 그러나 도나는 멈추지 않고 몰아쳤다. 그것은 차라리 불같은 집념이었다.

"-할 수 있어요. 포기하지 마요!"

닥터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를 제대로 얻어맞은 표정으로. 참견이 과했던 걸까, 정적이 길어져 도나 쪽이 내심 불안해질 무렵이었다. 제자리에서 펄쩍 일어난 그녀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도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고마워. 정말 그 말이 필요했어!"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네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함뿍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되뇌는 그녀의 모습에 도나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갑자기 변한 말투에 의미 모를 아릿함까지. 대체 뭐 하는 작자야, 이 사람? 그러나 무어라 의문을 표할 여유는 없었다. 갑자기 길 건너에서 울리는 폭음에 고개를 돌리니 정체불명의 녹색 외계인이 인파를 헤치고 도망치는 게 보였다.

또 외계인인가, 그런 류의 생각을 주워섬기고 도로 앞을 보니 어느새 여자는 사라져 있었다. 미지근히 식어가는 커피만이 두 잔 남아 아까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반증했다.

"조안?"

도나가 얼떨떨한 어조로 물었다. 당연히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안...?"

멀리 떨어진 거리의 인파 속에서 누군가의 금발이 햇빛을 찬란히 머금고 반짝였다. 바삐 옮기는 걸음을 따라 회색 코트가 흔들렸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닥터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는 것을, 도나는 우두커니 선 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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